Tuesday 14 August 2018

웨슬리가 읽은 소설 <벨리사리우스>

1772년 11월 23일 월요일, 웨슬리는 (영국 남서쪽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 "도킹(Dorking)"을 방문하였다. "만남의 집" 개설을 축하하는 목적이었다. 저녁에는 편안히 쉬고 다음날 저녁까지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엇을 하였을까? (“장 프랑수아 마르몽텔”의 소설) <벨리사리우스>*를 완전히 읽었다. 감동과 교훈을 주는 역사 소설이었다. 소감도 한마디 적어 놓았다. 소설에서, 왕의 의무를 지리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없었으면 딱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Mon. 23. I opened the new house at Dorking and was much comforted both this and the following evening. In returning to London, I read over Belisarius. The historical part is both affecting and instructive. But his tedious detail of the duties of a king might very well be spared.
* 각주1) <벨리사리우스>(1767)는 책 제목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며 소설가인 “장 프랑수아 마르몽텔”의 소설 <벨리제르>(1767)의 영어 번역본이다. 영어 번역본은 다음 링크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원문링크

프랑스에서는 읽는 것이 금지되었던 소설이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사형당한 랑리 톨랑달의 운명을 실랄하게 풍자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 정치의 희생물이 된 로마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운명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미술가 “다비드”의 그림 <구걸하는 벨리사리우스>**를 보면, 로마에서 저질러졌던 불의한 정치를 상상할 수 있다. 미술가 “다비드” 또한 소설 <벨리제르>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벨리제르>라는 소설이, 프랑스에서 저질러졌던 불의한 정치를 풍자했으니, 프랑스에서는 금서로 지정받을만했었다. 그 때는 불의한 정치가 대세였나 보다. 정치의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런 불의를 고발하는 발언을 강제로 금지하기도 하였다.

** 각주2) <구걸하는 벨리사리우스>(1781) : 다비드의 그림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림링크

그림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이렇다. 로마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한 벨리사리우스는, 말년에 정치적 모함을 받아 추방되었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거지가 되었다. 미술가 "다비드"는 <구걸하는 벨리사리우스>를 그려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개인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모두들 대단하다. 한 시대의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도 갖추고 있고, 글로 그림으로 표현하는 실력(?)도 갖추고 있다. 웨슬리도, 장 프랑수아 마르몽텔도, 다비드도, 모두 대단하다..^^*

Friday 10 August 2018

강단과 목회에 두 번째 글을 보내고

<강단과 목회>에 두 번째 글을 보냈다. 주제는 "시간 관리".

첫번째 이야기: 

규칙쟁이(Methodist)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시간 관리"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들에게 "시간"은, 아주 특별한 시간, "카이로스"라고 불리는 시간이었다. 카이로스의 내용을 알면 시간관리가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언제부터 "카이로스 시간 관리"가, 웨슬리의 삶 속에 체계를 잡았는지 분명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선재하는 은혜와 완전한 사랑에 대한 그들의 고백은 "카이로스 시간 관리 방법"을 통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웨슬리의 "신학"과 "방법"과 "생활"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웨슬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규칙쟁이들의 경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교과서가 있었다.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에 대한 치침서였다. 그 교과서의 1장 1절은, "거룩한 삶에 필요한 첫번째 도구 : 시간을 관리하라"였다. "시간 관리"를 거룩한 삶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도구로 소개한 내용이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서 존 웨슬리는, 일기 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꾸준히 계속해서 일기를 썼다. 시간 관리와 경건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기 쓰기를 발전시켰다.

두번째 이야기:

이같은 내용으로 두 번째 원고를 열심히 써서, 편집부에 넘겨 주었다. 그런데, 원고를 넘겨 준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일 주일 뒤에 연락이 왔다. "원고가 너무 길어요!"

그래서, 원고를 대폭 줄여서 다시 넘겨 주었더니, 그래도 안된단다. 이번에는 편집부에서 직접 사무실로 찾아 왔다. 30분 이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고쳐서,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꾸어 써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런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편집부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추상적인 설명은 줄이고, 실제 생활에 필요한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다시 고쳐 쓴 원고는 다음 달 <강단과 목회>에 실릴 예정이다. (혹시, 읽으실 분들은 아래에 "댓글"로 의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편집부 여러분께, 특히,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 각주1) Taylor, Jeremy. <The Rule and Exercise of Holy Living and of Holy Dying>, Printed... for T. Horne and others, 1719.